
1913 · 디트로이트 미술관 (Detroit Institute of Arts) · 출처
생애 Life
바실리 칸딘스키는 1866년 모스크바의 부유한 차(茶) 상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본래 화가가 아니라 법학자였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해 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냈고, 에스토니아 타르투(당시 도르파트) 대학의 교수직 제안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안정된 길을 포기한다. 결정적 계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1895~96년 모스크바에서 본 모네의 '건초더미(Haystacks)' 연작이었다. 칸딘스키는 처음에 무엇을 그린 것인지조차 알아보지 못했고("도록을 보고서야 건초더미인 줄 알았다. 알아보지 못한 것이 고통스러웠다") 당황했지만, 그 색채가 그의 기억에 지워지지 않게 각인되는 충격을 받았다 — 대상이 없어도 그림은 강력할 수 있다는 깨달음의 씨앗이었다. 다른 하나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들으며 음(音)에서 색이 보이는 공감각(synaesthesia) 체험을 한 것이다.
서른 살이던 1896년 그는 모스크바를 떠나 독일 뮌헨으로 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운다(처음엔 안톤 아즈베의 사설 학교, 이후 뮌헨 미술 아카데미에서 프란츠 폰 슈투크에게 사사). 1908년경부터 뮌헨 근교 바이에른의 작은 마을 무르나우에서 화가 가브리엘레 뮌터와 함께 강렬한 색의 풍경을 그리며 점차 형태를 추상화해 갔다. 1909년 신지학회(Theosophical Society)의 사상 등 영적 사조에 깊이 빠져들었다. 1911년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청기사(Der Blaue Reiter)' 그룹을 결성하고, 같은 해 미술이 외형이 아니라 내면의 정신을 표현해야 한다는 선언적 저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Über das Geistige in der Kunst)'를 출간한다. 1910~1913년 그는 마침내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을 거의 지우고 색·선·면 자체가 주인공이 되는 그림에 도달했다 — 서양미술 최초의 순수 추상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이번 전시에 나오는 '흰 형태를 위한 회화 연구'(1913)가 바로 이 절정기의 산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적국이 된 독일을 떠나 1914년 러시아로 돌아갔고, 러시아 혁명기에는 미술 행정·교육에 참여했다. 1921년 그로피우스의 초청으로 다시 독일로 와 1922년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교수가 되어 색채·형태 이론을 가르쳤고, 1926년 '점·선·면(Punkt und Linie zu Fläche)'을 펴낸다. 1933년 나치가 바우하우스를 폐쇄하자 파리 근교 뇌이쉬르센으로 이주했고, 1937년 나치는 그의 작품을 '퇴폐미술(Entartete Kunst)'로 낙인찍어 독일 미술관에서 몰수했다. 그는 1939년 프랑스 시민이 되었고 1944년 12월 뇌이쉬르센에서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양식과 혁신 Style & Innovation
칸딘스키가 처음으로 한 일은 단순하지만 혁명적이다. 그는 그림에서 '무엇을 그렸는가(주제)'를 빼버렸다. 산도, 사람도, 사과도 아닌 색과 형태 그 자체가 감정을 일으키도록 만든 것이다. 그는 색을 음(音)에, 그림을 음악에 비유했다. 노란색은 트럼펫처럼 날카롭게 튀어나오고 파란색은 깊은 첼로처럼 물러난다는 식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작품에 '인상(Impression)', '즉흥(Improvisation)', '구성(Composition)'이라는 음악 용어를 붙였다 — 각각 자연을 보고 받은 인상(재현적 요소), 무의식에서 즉흥적으로 솟은 감정 반응, 오래 계획해 구축한 '궁극의 작품(교향곡)'을 뜻한다.
이 전시의 7섹션 서사에서 그의 위치는 명확하다. 쿠르베의 사실주의에서 출발해, 인상주의(빛), 후기인상주의(고흐의 감정·세잔의 관점), 상징주의, 야수주의(마티스의 색채 해방), 입체주의(피카소의 형태 해체)를 거치며 그림은 점점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멀어진다. 마티스가 색을 자연에서 풀어주고 피카소가 형태를 부수었다면, 칸딘스키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뎌 대상 자체를 없앤다. 즉 그는 이 전시 전체가 향해 온 여정의 '도착지'다 — 모더니즘이 어떻게 추상이라는 문턱을 넘는가를 한 점으로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그를 추상으로 떠민 첫 충격이 바로 전시 2섹션의 뿌리인 인상주의(모네)였다는 점이다. '흰 형태를 위한 회화 연구'(1913)는 화면 우상단에 황금빛 돔 건물과 가파른 언덕, 우하단에 말을 탄 인물 같은 흔적이 가물거리지만 더 이상 그것을 '읽을' 필요가 없는, 추상과 구상의 경계선에 정확히 놓인 작품이다. 동시에 칸딘스키는 추상을 단순한 형식 실험이 아니라 물질주의 시대를 정신적으로 구원하려는 '영적 기획'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그의 추상은 디자인이 아니라 신앙에 가깝다.
기법: 캔버스 앞에서 무엇을 볼까 Technique
칸딘스키의 1913년경 캔버스 앞에서는 '읽으려' 하지 말고 '들으려' 해보는 것이 좋다. 시선을 한 점에 고정하지 말고 화면 전체를 음악 듣듯 훑으면, 색 덩어리들이 앞으로 튀어나오고 뒤로 물러나며 리듬을 만드는 것이 느껴진다. 이 시기 그의 물감 다루기는 두 층위로 보인다. 하나는 묽게 풀어 캔버스에 스며들 듯 번진 투명한 색면(워시처럼 흐르는 배경)이고, 다른 하나는 그 위에 빠르고 단호하게 그은 검은 윤곽선과 점·획이다. 이 검은 선들은 형태를 '묘사'하는 선이 아니라 음악의 강세처럼 화면에 긴장을 주는 독립적 요소다. 임파스토(물감을 두껍게 쌓는 기법)는 절제되어 있어, 반 고흐 같은 두툼한 붓자국보다는 색의 충돌과 선의 운동에서 에너지가 나온다.
실물 앞에서 챙겨볼 디테일: (1) 색면의 가장자리가 칼처럼 딱 떨어지는 곳과 안개처럼 번지는 곳이 공존한다 — 그 대비가 '단단함 vs 부유함'의 리듬을 만든다. (2) 흰색(타이틀의 'White Form')이 단순한 빈 바탕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칠해진 '형태'로 화면을 가르며 다른 색들을 밀어내는 힘으로 작동한다. 칸딘스키에게 흰색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침묵·가능성을 잉태한' 색이었다(그는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등에서 흰색을 "가능성으로 충만한 침묵의 화음", 검은색을 "죽은 침묵"이라 했다). (3) 우상단을 자세히 보면 가파른 언덕 위 황금빛 돔 건물의 윤곽 — 그가 살던 바이에른 풍경과 고향 러시아 건축의 기억 — 이 가물거리고, 우하단의 수직·수평선 무리는 칸딘스키 작품의 반복 모티프인 '말을 탄 기수'가 푸른·흰 형태를 향해 도약하는 형상(영적인 것의 상징)을 암시한다.
작품의 정체성에서 한 가지 명심할 점: 제목 그대로 이것은 '연구(Study)' — 더 큰 완성작을 위한 준비작이다. 디트로이트 본은 99.7×88.3cm의 세로로 긴 캔버스이고, 칸딘스키가 1913년에 이를 발전시킨 더 크고 추상화된 최종작 '흰 형태가 있는 그림(Painting with White Form / Bild mit weißer Form)'은 따로 존재한다(헤이그 미술관 Kunstmuseum Den Haag 소장으로 알려짐 — 확인필요). 따라서 디트로이트 작품에는 화가가 구도를 시험하고 결정해 나간 '망설임의 흔적'이 더 생생하게 남아 있을 수 있다. (단, 디트로이트 본에 대한 X선·적외선 조사 결과가 공개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으므로, 구체적 밑그림·펜티멘토 정보는 확인필요.)
대표작 깊이 보기 Key Works

1913 ·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 디트로이트 미술관 (Detroit Institute of Arts), 유럽회화부 / 소장번호 57.234 / Credit Line: Gift of Mrs. Ferdinand Moeller (페르디난트 묄러 부인 기증, 1957) · 출처
왜 중요한가
이번 전시의 '종착점'이자 핵심 작품. 서양미술이 인상주의 이후 어떻게 대상을 버리고 순수 추상에 도달했는지를 한 점으로 증언한다. 우상단의 황금빛 돔 건물·언덕, 우하단의 '말 탄 기수' 모티프 같은 구상의 흔적이 가물거리지만 더 이상 그것을 알아볼 필요가 없는, 구상과 추상의 정확한 경계선에 놓여 있다. 칸딘스키 초기 추상의 절정기 1913년작으로, 그의 '구성 7'·'흰 테두리가 있는 그림' 등 같은 해의 명작군과 한 호흡 속에 있다.
👁 감상 포인트 — 이렇게 보세요
(1) 제목의 '흰 형태(White Form)' — 화면을 가르는 흰 덩어리가 빈 여백이 아니라 다른 색들을 밀어내는 '능동적 형태'로 작동하는지 보라. 칸딘스키에게 흰색은 '가능성을 잉태한 침묵'의 색. (2) 묽게 번진 투명한 색면 위에 빠르고 검게 그은 선·점의 두 층위. 선은 무언가를 그리려는 게 아니라 음악의 강세처럼 긴장을 준다. (3) 우상단 — 가파른 언덕 위 황금빛 돔 건물의 윤곽(바이에른 풍경+러시아 건축의 기억). (4) 우하단 — 수직·수평선 무리가 암시하는 '말 탄 기수'가 푸른·흰 형태를 향해 도약하는 형상. (5) 색이 앞으로 튀어나오고(노랑·빨강) 뒤로 물러나는(파랑) 공간감.
비하인드 스토리
이 작품은 단독 완성작이 아니라 더 크고 추상화된 최종작 '흰 형태가 있는 그림(Painting with White Form / Bild mit weißer Form)'을 위한 '연구(Study)'다. 출처(프로방스)가 특히 드라마틱하다: 원래 베를린의 화상 페르디난트 묄러 갤러리(Galerie Ferdinand Möller) 소장이었는데, 2차 대전 직전인 1938년 4월 묄러와 당시 DIA 관장 빌헬름 발렌티너(W. R. Valentiner)의 합의로 이 그림을 포함한 여러 점이 '안전을 위해' 디트로이트 미술관에 보관되었다 — 나치가 독일에서 모더니즘을 '퇴폐미술'로 몰아 몰수하던 시기와 겹친다. 전후 묄러 가문을 거쳐 1957년 페르디난트 묄러 부인이 DIA에 정식 기증했다(소장번호 57.234).

1913 ·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State Tretyakov Gallery) · 출처
왜 중요한가
디트로이트 전시작과 같은 1913년, 칸딘스키 초기 추상의 정점으로 꼽히는 대작. '흰 형태를 위한 연구'가 어떤 시기적 폭발 속에서 나왔는지 맥락을 준다. 칸딘스키는 이 거대한 화면을 30점 이상의 습작 끝에 본 그림 자체는 단 며칠(1913년 11월 25~28일, 약 나흘) 만에 완성했다고 전해진다(동반자 뮌터의 일기 증언). 종말(아포칼립스)·부활·홍수·에덴동산 같은 영적 주제를 추상으로 응축했다.
👁 감상 포인트 — 이렇게 보세요
(도판 참고) 디트로이트 연구작과 같은 어휘 — 번진 색면 + 검은 선·점의 폭발 — 가 훨씬 큰 규모로 펼쳐진다. 화면 중앙의 소용돌이 핵을 중심으로 형태들이 회전하는 운동감을 보라.
비하인드 스토리
칸딘스키는 '구성(Composition)'이라는 제목을 가장 격이 높은 작품, 즉 오래 계획해 구축한 교향곡 같은 그림에만 붙였다(1939년까지 단 10점). '구성 7'을 위해 30점 이상의 습작·수채·유화 연구를 남겼는데, 이는 그의 추상이 즉흥처럼 보여도 사실은 치밀하게 계산된 것임을 보여준다. 디트로이트의 '흰 형태를 위한 연구' 역시 같은 '연구→완성' 작업 방식의 산물이다.
1913 (5월) ·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Solomon R. Guggenheim Museum) · 출처
왜 중요한가
디트로이트 작품과 '흰색'의 조형적 의미를 공유하는 대표작. 칸딘스키는 1912년 가을 모스크바 여행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을 다섯 달간 16점 이상의 습작으로 탐구한 끝에 '흰 테두리'라는 해결에 도달했다. 디트로이트 본의 '흰 형태'가 공간을 가르는 힘이라면, 이 작품의 '흰 테두리'는 복잡한 화면을 하나로 묶는 통일자다 — 흰색을 '형태/구조 요소'로 다루는 칸딘스키의 사고를 보여준다.
👁 감상 포인트 — 이렇게 보세요
(도판 참고) 좌상단의 세 갈래 형태(삼두마차 트로이카 troika 암시)와, 화면을 가로지르는 빛나는 흰 형태(성 게오르기우스의 창/용 퇴치 모티프)를 찾아보라 — 디트로이트 본의 '말 탄 기수' 모티프와 같은 계보다.
비하인드 스토리
칸딘스키는 저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흰색을 "가능성으로 충만한 침묵의 화음", 검은색을 "죽은 침묵"이라 했다. 이 '흰 테두리' 연작은 그가 '흰색'을 얼마나 진지하게 조형 요소로 다뤘는지를 보여주며, 디트로이트 '흰 형태' 연구와 같은 1913년, 같은 주제의식 속에서 나왔다.
단순 지식으로는 알기 어려운 이야기 Behind the Canvas
01법학 교수가 될 뻔한 화가
칸딘스키는 늦깎이 화가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전공해 학자로 성공했고, 에스토니아 도르파트(타르투) 대학의 교수직 제안까지 받았다. 그러나 서른 살이던 1896년, 이 안정된 길을 모두 버리고 그림을 배우러 뮌헨으로 떠난다. 미술의 가장 급진적 혁명(순수 추상)을 일으킨 사람이 사실은 법률·경제 전문가였다는 점은, 그의 추상이 충동이 아니라 치밀한 '이론'에서 출발했음을 짐작케 한다.
02모네의 건초더미 앞에서의 충격
1895~96년 모스크바에서 모네의 '건초더미' 연작을 본 칸딘스키는 처음에 무엇을 그린 그림인지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후일 회고에 "도록을 보고서야 건초더미임을 알았다. 알아보지 못한 것이 고통스러웠다. 화가가 그렇게 흐릿하게 그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러나 그 색채는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대상이 없어도 색과 형태만으로 강렬할 수 있다'는 이 깨달음이 훗날 추상으로 가는 첫 씨앗이 되었다.
03음악이 색으로 보이는 사람
칸딘스키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들으며 음에서 색이 떠오르는 공감각(소리→색 공감각, chromesthesia)을 경험했다고 전한다. 그는 색을 악기 소리에 비유했고('노랑은 트럼펫, 파랑은 첼로'), 작품 제목도 '인상·즉흥·구성'이라는 음악 용어로 붙였다. 그래서 그의 추상화 앞에서는 '읽기'보다 '듣기'가 더 정확한 감상법이다.
04나치를 피해 '안전하게' 디트로이트에 보관되어 있던 그림
이 전시작의 출처(프로방스)에는 나치 시대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원래 베를린의 화상 페르디난트 묄러의 소장품이었는데, 2차 대전 직전인 1938년 4월 묄러와 당시 DIA 관장 빌헬름 발렌티너의 합의로 이 그림을 포함한 여러 점이 '보관' 명목으로 디트로이트로 건너왔다. 즉 나치가 독일에서 칸딘스키를 '퇴폐미술가'로 몰아붙이던 바로 그 시기에, 이 그림은 대서양 건너 디트로이트에서 피난처를 찾은 셈이다. 전쟁이 끝난 뒤 1957년 페르디난트 묄러 부인이 DIA에 정식 기증하면서 영구 소장품이 되었다.
05나치가 '퇴폐미술'로 낙인찍다
1933년 나치가 바우하우스를 폐쇄하자 칸딘스키는 파리 근교 뇌이쉬르센으로 망명했다. 1937년 나치 정권은 그의 작품을 '퇴폐미술(Entartete Kunst)'로 규정해 독일 미술관에서 몰수했다 — 후대에 정리된 나치 몰수 '퇴폐미술' 목록(1만6천여 점)에 칸딘스키 작품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 독일에서의 박해가 역설적으로 그의 1913년 걸작들을 미국·서유럽 미술관의 '추상 기둥'으로 남기는 배경이 되었다.
실물 앞에서의 체크포인트
- 읽지 말고 들어라: 한 점에 시선을 고정하지 말고 화면 전체를 음악 듣듯 천천히 훑으면, 색 덩어리들이 튀어나오고 물러나며 만드는 리듬이 느껴진다. 이것이 칸딘스키가 의도한 감상법이다.
- 두 층위를 구분하라: (아래층) 묽게 풀어 캔버스에 스며들 듯 번진 투명한 색면과, (위층) 그 위에 빠르고 단호하게 그은 검은 선·점·획. 검은 선은 형태를 묘사하는 윤곽이 아니라 음악의 강세 같은 독립적 요소다.
- '흰 형태'를 추적하라: 제목 그대로, 화면을 가르는 흰 덩어리가 단순한 빈 바탕이 아니라 다른 색을 밀어내는 능동적 '형태'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라. 칸딘스키에게 흰색은 '가능성을 잉태한 침묵'의 색, 검은색은 '죽은 침묵'이었다.
- 숨은 형상의 잔영 찾기: 우상단에서 가파른 언덕 위 황금빛 돔 건물(바이에른 풍경+러시아 정교회 기억)을, 우하단에서 푸른·흰 형태를 향해 도약하는 '말 탄 기수'의 수직·수평선을 찾아보라.
- 색의 공간감: 노랑·빨강은 앞으로 튀어나오고 파랑은 뒤로 물러난다. 원근법 없이 색만으로 만들어진 깊이를 느껴보라.
- 표면을 비스듬히 보라: 측광에서 붓의 진행 방향과 덧칠 순서(먼저 번진 색 → 나중에 그은 선)가 드러난다. 임파스토는 절제되어 있어 에너지는 두께가 아니라 선과 색의 충돌에서 나온다.
- '연구작(Study)'임을 기억하라: 이것은 더 크고 추상화된 최종본 'Painting with White Form'을 위한 준비작이다. 화가가 구도를 결정해 가던 즉흥성·망설임의 흔적을 상상하며 보라.
- 세로긴 화면의 에너지: 99.7×88.3cm의 세로로 약간 긴 화면이다. 세로 형식이 만드는 상승·도약의 운동감('기수'의 도약)을 느껴보라.
- 전시 동선상의 위치를 의식하라: 쿠르베→인상주의→고흐·세잔→마티스→피카소를 모두 지나 도착하는 마지막 지점의 작품이다. 앞서 본 모든 화가들이 한 걸음씩 자연에서 멀어진 끝에 '대상이 거의 사라진' 이 지점에 이르렀음을 되새기며 보라.
다른 작가·사조와의 연결 Connections
이번 전시 안에서 칸딘스키는 마티스·피카소가 시작한 일을 끝까지 밀어붙인 인물이다. 마티스(야수주의)가 색을 자연의 속박에서 풀어주고, 피카소·브라크(입체주의)가 형태를 해체했다면, 칸딘스키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뎌 '대상' 자체를 지워 순수 추상에 도달했다. 출발점에서 그를 흔든 것은 인상주의의 모네('건초더미')였으니, 전시 2섹션 인상주의(르누아르·드가)와 마지막 추상이 한 줄로 이어진다. 세잔이 생트빅투아르 산을 '대상이 아니라 보는 방식'으로 그렸다면, 칸딘스키는 그 다음 논리적 단계로 대상 자체를 떠난다. 또한 같은 시기 독일 표현주의(베크만·코코슈카, 7섹션)와는 '내면·정신의 표현'이라는 뿌리를 공유하지만, 칸딘스키는 구상을 끝내 버렸다는 점에서 갈라진다. 디트로이트 미술관 차원에서는, 1922년 미국 미술관 최초로 반 고흐(밀짚모자 자화상)와 마티스(창문)를 사들이고 1924~45년 관장 빌헬름 발렌티너 아래 독일 모더니즘을 미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수집한 진취적 정신의 산물이 바로 이 칸딘스키 추상화다(발렌티너는 1938년 이 그림을 나치를 피해 DIA에 보관해 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사실 Did You Know
- 디트로이트 본에 대한 X선/적외선 조사로 밝혀진 밑그림·펜티멘토 정보. — low: 디트로이트 본에 대한 공개된 기술적(테크니컬) 조사 자료를 확인하지 못함. 본문에 '확인필요'로 명시. 추측 금지.
- '구성 7'의 본 그림을 단 며칠(약 나흘) 만에 그렸다는 일화. — medium: 1차 브리핑은 '사흘'로 적었으나, 이번 세션 재확인 결과 위키백과·복수 매체는 '준비작 30여 점 후 본 그림은 1913년 11월 25~28일 약 나흘 만에 완성'(뮌터의 일기 사진·메모 기록, 11월 28일 '그림 완성')으로 서술 — '사흘'→'약 나흘(11/25~28)'로 정정. 증언 성격이므로 일화 수준으로 표기.
출처 보기 (10)
- https://dia.org/collection/study-painting-white-form/50371
- https://www.wikidata.org/wiki/Q64576617
-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study-for-painting-with-white-form-wassily-kandinsky/WAHqZ5Ei34I0xA
- https://en.wikipedia.org/wiki/Wassily_Kandinsky
- https://en.wikipedia.org/wiki/Composition_VII
- https://www.guggenheim.org/exhibition/kandinskys-painting-with-white-border
- https://www.moma.org/collection/works/34885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Kandinsky_-_Study_for_Painting_with_White_Form,_1913.jpg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Paintings_by_Wassily_Kandinsky_in_the_Detroit_Institute_of_Arts
- https://en.wikipedia.org/wiki/Der_Blaue_Reiter